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폴레옹 2세 (문단 편집) === 출생과 어린 시절 === [[파일:Napoléon II.Childhood.jpg]] [[파리(프랑스)|파리]]의 튈르리 궁전에서 1811년에 나폴레옹 1세와 황후 [[마리 루이즈]]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폴레옹 1세가 42세라는 늦은 나이에 본 늦둥이였던 그는 태어나면서 아버지로부터 [[로마왕]]의 작위를 받았는데, 유일한 적자인 나폴레옹 2세의 황위계승 정당성을 갖게 하려는 목적에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나폴레옹의 형제들은 자신들의 제위 계승이 통째로 날아간 것에 이를 갈았다고 한다. 마리 루이즈가 나폴레옹 2세의 양육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모성애가 부족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지만, 당시 왕족들은 어머니와 떨어져서 유모가 키우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긴 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연패하면서 점차 파리로 포위망이 좁혀 오던 시기에 신하들도 점차 나폴레옹을 배신하는 와중에 흔들리는 프랑스 궁정에서 홀로 중심을 바로 잡으려고 고군분투했던 것은 마리 루이즈였다. 심지어 그녀는 파리 포위를 대비하여 피신하라는 나폴레옹의 명과 신하들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피신을 거부하고 파리를 사수하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 "파리를 비우는 일은 [[부르봉 왕조]]의 부활에 절호의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나는 이대로 파리에 머무르는 것이 황제 부재시의 섭정을 맡은 프랑스 황후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급박한 위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렇게 당차게 행동한 것은 무엇보다도 아들 나폴레옹 2세가 제위에 오를 수 있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친정인 [[오스트리아 제국]]의 도움을 받아 이것이 실현 가능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결국 [[제국]]은 붕괴했고, 마리 루이즈는 어린 아들 나폴레옹 2세를 데리고 랑부예 성으로 이동했지만 랑부예가 이미 위험했기에 블루아 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1814년 4월 8일, 아버지 나폴레옹 1세가 퐁텐블로 조약으로 퇴위당하고 엘바 섬 유배행이 결정되었다. 어머니 마리 루이즈는 '''눈물어린 호소'''로 아버지에게 요청했지만 [[프란츠 2세]]는 딸의 요청을 거절했다.[* 물론 촌놈인 나폴레옹에게 패하고 딸을 빼앗긴 프란츠 1세 입장에서 나폴레옹을 구해줄 리가 만무했다. 나폴레옹 역시 프란츠 1세를 싫어하긴 마찬가지라서 마리 루이즈에게 '당신 아버지는 가나쉬(프랑스어로 쓸모없는 늙은이)요'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프랑스어를 모르는 마리 루이즈는 시종에게 그 뜻을 물어보았는데, 당황한 시종은 "멋지고 영리한 어르신"이라는 뜻이라고 왜곡했다. 마리 루이즈는 나중에 나폴레옹이 없는 자리에서 프랑스인 재상에게 가나쉬라고 칭찬하면서 분위기를 얼려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을 따라 엘바 섬에 가겠다고 했으나,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에 애정이 없었던 것인지 오스트리아 황녀인 그녀를 의심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초라해진 처지를 스스로 부끄러워한 것인지 끝내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에게 가려고 했으나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가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상황이었다. 뒤늦게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의 진심을 알고 자신에게 돌아와달라고 했으나 이미 여의치 않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4월 13일에 랑부예 성에 갇혀있던 마리 루이즈와 나폴레옹 2세 모자를 구하기 위해 프란츠 2세가 직접 찾아왔다. 프란츠 2세의 결정으로 모자는 오스트리아 연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로 송환된 이후로도 마리 루이즈는 오스트리아를 탈출하여 엘바섬으로 가서 나폴레옹을 만날 궁리만 하고 있었고, 이를 우려한 메테르니히는 잘생긴 나이페르크 백작으로 하여금 그녀를 호위하게 했다. 메테르니히는 나이페르크 백작에게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라고 명령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 곧 나이페르크 백작에게 빠져버린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을 완전히 잊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한 후 [[백일천하]]가 시작되었고, 나폴레옹은 아들이 보고 싶어 '''"이제 그만 돌아와 주오."'''라고 편지를 썼지만 그녀는 이미 나이페르크 백작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나폴레옹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대패하고 완전히 희망을 잃어버린 나폴레옹은 아들이라도 어떻게든 제위에 앉혀보자는 심정으로 6월 22일 퇴위를 선언하고 나폴레옹 2세를 새로운 황제로 선포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린 후 도피했다. 나폴레옹의 퇴위 선언 직후 프랑스 정부 위원회가 구성되어 정권을 인수했다. 위원회는 루이 18세가 복위할 때까지 2주간 프랑스를 임시로 통치했다. 위원회는 곧바로 피신해 있던 [[루이 18세]]에게 연락하여 복귀를 요청했고 루이 18세는 곧바로 나폴레옹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프랑스 여론 또한 오스트리아 황실의 어린아이가 새로 황제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있었다. 위원회는 나폴레옹 2세를 인정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나폴레옹 2세가 머물고 있는 오스트리아 황실 측에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나폴레옹 2세의 보호자였던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 또한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루이 18세의 복위를 천명하고 있는 연합국의 입장에 동의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황궁에 머물고 있던 4살의 나폴레옹 2세는 이러한 사태를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연합군은 계속해서 파리를 향해 진격했고 마침내 7월 7일 파리에 입성했다. 7월 8일 마침내 연합국의 추대를 받아 루이 18세가 정식으로 복위했다. 오스트리아로 망명한 이후에는 퍼스트 네임인 나폴레옹 대신 풀 네임인 나폴레옹 프랑수아 조제프 샤를에서 프랑수아를 독일어식으로 읽은 프란츠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외가인 합스부르크 가문 측과 독일, 오스트리아 쪽에서는 그의 이름을 '나폴레온 프란츠 보나파르테'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1816년 3월 7일 마리 루이즈가 파르마 공국의 통치권을 일임받게 되었다. 이로서 마리 루이즈와 나폴레옹 2세는 완전히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5세. [[1818년]] 프란츠 2세는 7세가 된 외손자 나폴레옹 '''프란츠'''에게 '라이히슈타트 공작' 작위를 내렸다. 합스부르크 가문이지만 외손인 관계로 [[대공]](Erzherzog) 작위를 받을 수는 없었다. 이후 그는 '라이히슈타트 공작 프란츠'로 불리게 된다. 1821년 그의 나이 10세 때 아버지 나폴레옹 1세가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5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메테르니히가 이 소식을 전했을 때 나폴레옹 2세는 눈물을 쏟으며 들었다고 한다. 비록 얼굴도 기억할 수 없는 아버지였지만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고.[* 워낙 아들에 대한 나폴레옹의 애정이 지극했기 때문인지 나폴레옹 2세도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좋았던 것 같다. 나폴레옹의 비서였던 멘느발과 만났을 때 그에게 '''"멘느발 아저씨, 아빠한테 많이 사랑한다고 전해줘."'''라고 속삭였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